지난 13일 서울 강동아트센터에서 개막한 어린이 뮤지컬 <로빈슨 크루소>. 아이와 함께 보던 부모들은 로빈슨 크루소의 첫 등장에 고개를 갸웃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로빈슨’이라고 밝힌 무대 위 배우가 여자였기 때문이다. 로빈슨은 남자가 아니었나? 1719년 대니얼 디포의 소설이 발간된 이후 280여년간 연극·만화 등 수많은 어린이 콘텐츠로 재탄생했지만 여자가 로빈슨 역할을 맡은 적은 없었다.
제작사인 문화공작소 상상마루 엄동렬 대표는 <로빈슨 크루소>를 쓰레기로 가득한 무인도를 자연 본래 상태로 되돌리는 환경 이야기라고 소개하면서 “남녀 배우가 번갈아 맡아도 내용에 무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뮤지컬을 보면서 환경적인 문제에 공감하는 동시에 성역할에 대해서도 편견을 갖지 않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배역 성별을 특정하지 않고 남녀가 번갈아 맡는 것을 ‘젠더 프리 캐스팅’이라고 하는데,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광화문 연가> 등 성인극에서는 1~2년 전부터 시도하고 있으나 어린이극에서 이런 실험을 한 것은 <로빈슨 크루소>가 처음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로빈슨 외에도 소라게인 ‘구렙’ 역할도 남녀 배우가 번갈아 맡는다.
‘위험한 실험실 B-123’. 종로문화재단 아이들극장 제공
성평등 개념을 녹여낸 또다른 사례도 있다. 20일 개막하는 <위험한 실험실 B-123>(극단 잼박스)은 11살 ‘현실’과 7살 ‘미래’ 자매가 국립 해양생태계연구소에 숨겨진 비밀을 밝히는 추리극인데, 유명한 과학자 등 출연진이 모두 여자다. 지금까지 어린이물에선 박사나 과학자는 대부분 남자로 설정돼왔다. 특히 실험실의 실험체인 바다 생명체 자유는 성별을 특정짓지 않았다. 박영희 연출가는 “성비 균형도 고민했지만 극작 과정에서 남성 캐릭터가 없이도 작품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서로 다름에 대한 인정을 여성들을 중심으로 펼쳐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동안 어린이 프로그램은 엄마는 집안일, 아빠는 회사 가는 식으로 보수적인 성역할 관념을 드러내기 일쑤였다. ‘2018 대중매체 양성평등 모니터링 보고서’(2018년 6월 발표)를 보면, 4월1~7일 방송한 어린이 애니메이션 112개를 분석한 결과 주인공이 남성인 경우는 57.9%, 여성인 경우는 31.6%였다. 성차별적인 내용도 많았다. <로보카 폴리>의 경우 주요 캐릭터 6명 중 여성 캐릭터는 1명인데, 남성은 용감한 모습을 강조하지만 여성은 외모에만 관심 많은 약한 캐릭터로 그려지는 식이다. 현재 방영되고 있는 <교육방송>(이비에스) 애니메이션을 살펴봐도 대다수가 남자는 파란색, 여자는 분홍색으로 표현된다. 악당에 맞서는 영웅들의 이야기인 <미니특공대 엑스(X)>에서 리더 수컷 다람쥐는 파란색, 암컷 사막여우 루시는 분홍색 옷을 입는 식이다. 한 시청자는 프로그램 게시판에 “여성 캐릭터를 많이 만들어주시고 제발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색을 부여해달라”고 제안했다.
최근 국외 어린이 콘텐츠에선 젠더 감수성과 다양성이 중요한 이슈다. 영국 인기 만화 <꼬마기관차 토마스와 친구들>은 2018년에 아프리카 케냐 출신의 니아와 영국 출신 레베카 등 여성 캐릭터를 추가했다. 이전 기차들은 토마스·퍼시·제임스·고든 등 남자가 전부였고, 유일한 여성 캐릭터 에밀리 기차는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렀다. 성별에 따른 캐릭터도 재창조된다. 일본 애니메이션 <허긋토! 프리큐어>는 오빠가 악당에게 잡혀가자 여동생들이 전사로 변해 구출에 나서고, 디즈니 만화 <꼬마 의사 맥스터핀스>에선 소아과 의사인 엄마가 일을 하고 아빠가 육아와 가사를 도맡는다. 여자아이 멜린다는 축구를 하고 남자 모델 데클란은 모델보다 간호사가 되기를 원한다. 금발 머리에 8등신 백인 여성으로 대표되던 바비 인형은 탄생 60돌을 맞은 올해 점프슈트 차림 트럭운전사, 프로복서, 스포츠기자 등 ‘일하는 바비’의 다양한 모습을 선보였다.
한국은 이제 첫걸음을 뗐다. 지난달 14일 시민단체 ‘정치하는엄마들’은 ‘핑크 노 모어’ 캠페인을 벌이면서 “아이들이 여과 없이 접하는 미디어 콘텐츠가 수많은 혐오와 차별 고정관념을 담고 있다”며 변화를 촉구했다. 이들은 누리집을 개설해 미디어 속 혐오·차별 콘텐츠를 수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제도 개선, 프로그램 시정 요구 등 미디어 감시 활동을 벌인다. 박영희 연출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자라난 남성들은 자기들과 다른 성을 인정하는 데 서투르다”며 “예술은 어린이들에게 강요하지 않고 교육하지 않으면서 작품을 통해 자연스럽게 성평등 모델을 제시하고 소개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