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리 카트슨 사람들> (1991, 감독 장 피에르 주네)1) 의 마지막 신은 주인공과 정육점 딸이 지붕 위에서 톱과 첼로로 연주하는 장면으로 끝맺는다. 비극적이고 우스꽝스러운 현실 속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하는 이 장면은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손꼽히고 있다.
TV 채널을 통해 일주일에 한번 관람이 가능했던 주말의 명화는 여건상 극장 나들이가 허락되지 않았던 유년시절 내가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예술매체였다. 오늘날 손에 꼽을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한 종류의 매체를 통하여 심지어 보고 싶은 것들을 골라보는 옵션까지 가능해졌지만 오히려 그 당시 테레비의 제왕인 주말의 명화 편성 PD님 맘대로 강제 관람했던 그 명화들을 보며 느꼈던 흥분과 감동이 그립다. 아마 초등학교 6학년 즈음 어김없이 찾아온 어느 주말에, 어김없이 찾아와준 주말의 명화, 그리고 내 인생의 영화 <델리 카트슨 사람들>을 보며 경험했던 아찔한 기억은 어른이 되고 있는 지금까지도 예술을 향한 나의 열망(?)에 불쏘시개 역할을 해주고 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영화가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아마 당시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리고 기억해내려 애쓰지도 않았다. 다만 그때의 아름다운 장면들을 통해 느꼈던 아찔한 감정들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한 감정들로 발현된 B급 에너지로 근근이 현실을 버티고 있으니 말이다.
자라나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자극들은 곧 경험이 되고, 경험은 인지를 향상시켜 사회적 인간으로 자라나는데 중요한 요인이 된다. 유년시절의 행복하고 아름다운 자극은 곧 경험으로 학습되어 감각적이고 능동적인 사회적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는 아동기 문화예술 경험의 순기능2) 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소 역할론적이지만 아동기 공연예술 경험을 통해 감각적이고 사회적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대전제를 믿음으로 어린이극장은 오늘도 열심히 불을 밝히고 있다.
2015년 9월 국립아시아문화전당3)(이하 전당) 어린이 공연문화축제의 개막과 함께 국내 최초의 어린이 전용극장인 어린이극장이 문을 열었다.
어린이극장은 통나무를 그대로 잘라놓아 나이테를 연상시키는 객석과 옹이 모양의 무대로 국내 보기 드문 원형극장의 디자인을 갖추고 있다. 최대 200명이 관람 가능한 캐주얼한 객석, 중극장 규모에 버금가는 결코 작지 않은 무대, 2개의 분장실과 리허설룸, 조정실 등을 완비하였고 트렌드에 맞게 무대장치와 장비를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하며 세계 최고의 어린이 전용극장으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수차례 음향 환경 테스트를 통해 원형극장의 장점인 이상적 음향 반사와 잔향, 소리 전달이 탁월해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아도 극적인 음향 연출이 가능하다. 다만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 객석은 성인 관객들이 장시간 관람 시 다소 불편함이 발생하여 보강이 필요하다.
※ 자세한 극장정보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 홈페이지-대관안내-어린이극장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www.acc.go.kr
광주는 역사적으로 거리 에너지가 응축되어 거리문화에 대한 갈망과 애정이 남다르다. 거리 에너지의 중심이었던 이곳 금남로와 충장로에서 태동한 전당의 건축학적 구조 또한 거리문화 유행에 최적화되어있다.(실제로 전당은 3개의 중대형 광장과 2개의 잔디밭을 포함해 10곳이 넘는 공연 스폿이 존재하며 2017년 6월 세계최고의 거리극을 표방한 ACC 광주 프린지 인터내셔널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건축학적 인프라를 활용하여 월드 뮤직 페스티벌, ACC 광주 프린지 인터내셔널 등 시즌 축제를 비롯해 매주 청년예술가들과 함께하는 D;Bridge Market 등 전당과 도심을 방문하는 시민들의 일상에 근접하는 거리예술을 도모하고 있다.
이와 함께 어린이 문화원 공연 프로그램은 시민들에게 보다 효과적인 접근을 위해 극장 공연 형태인 마이 리틀 시어터4) 와 거리공연 형태인 서커스 매직 유랑단5) 등 크게 두 가지 콘셉트로 프로그램을 구성하여 일상의 장소에서, 많은 관객들에게, 다양한 종류의 공연을 제공’ 하는 공연의 일상화를 꾀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들은 2016년 봄 시즌 공연을 시작으로, 여름방학 공연, 가을-겨울 시즌 공연 등 6차례의 시즌 공연을 통해 현재 명실상부 전당의 대표 어린이 공연 프로그램6) 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지난 2017년 5월 전당의 대표 봄 축제인 ‘어린이 가족문화축제 How Fun’과 연계하여 진행된 봄 시즌 공연에서는 축제를 찾은 관람객을 위한 옴니버스형 프로그램으로 10여 개국 40여 작품이 3만 5천여 명의 관객과 함께하였다.
아시아의 소재를 활용해야 하는 전당의 숙명(?)을 이어 아시아 스토리 기반의 창작공연 개발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중앙아시아 설화를 모티브로 현대문명의 이기 속에서 자연과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깔깔 나무를 시작으로, 시베리아의 장대한 설원을 배경으로 역경을 이겨내는 피리 부는 아이의 이야기인 작은 악사, 우리나라의 주옥같은 현대 단편문학을 극화한 ‘쿵짝’ 시리즈 등 개관 이후 총 10편의 창작 공연이 개발되고 있다.
비단 공연 생산에만 치중하지 않고 국내외 보급을 위한 프로세스 개발에도 관심을 쏟고 있다. 전당 내 쇼케이스 공연을 통하여 관객 반응을 살피고, 의견수렴, 보완을 거쳐 지역과 국내외로의 보급 과정은 생산보다 훨씬 큰 에너지가 소모된다.
대표적인 공연 보급사업인 한국 문화예술회관 연합회 방방곡곡 문화 공감7)을 통하여 2016년부터 현재까지 깔깔 나무, 작은 악사 등 아시아의 이야기를 품은 전당의 대표 공연 콘텐츠들은 전국 방방곡곡을 누리며 소외된 지역에 공연예술을 보급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아시아 소재들로 개발된 이 공연들은 현지 주한 문화원의 초대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의 공연이 진행, 예정 중이며 특히 2018년 아시테지 겨울축제 공식참가작인 작은 악사는 지난 2017년 12월 이란에서 개최된 제 24회 국제 어린이청소년 연극축제에서 연출상, 음악상 등 4개 부분을 수상하여 국내외 큰 호응을 받고 있다.
1990년대 어린이 공연축제, 작품 개발 지원 등 어린이 공연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투자했던 지역 기반 백화점의 몰락과 동시에 잠시 전성기를 맞이하였던 지역 어린이 공연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상업성이 떨어지는 극장용 어린이 공연 제작비를 마련하지 못해 창작은 엄두를 못 내고 현재 문화센터, 키즈카페 등에서 캐릭터가 등장하는 킬링타임용 공연이 주를 이루고 있다.8)
지역 어린이 공연 예술의 활성화를 위한 첫걸음으로 지난 2017년 12월 진행된 어린이 공연 개발 워크숍9) 을 통해 지역 어린이 공연문화 부흥을 위한 전략 수립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특히 이번 워크숍 개막작으로 참가한 ‘이야기 배달부 동개비’는 광주 양림동의 충견을 소재로 선행 개발되어 인기리에 방영 중인 애니메이션을 공연화하는 과정에 어린이 문화원이 지원하여 성공적인 쇼케이스를 마치며 지역공연 예술 인큐베이팅의 가능성을 볼 수 있었다. 워크숍에 참여하였던 지역 극단 대표는 ‘최고의 어린이 극장이 광주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지역 내 어린이 공연에 대한 이슈가 생기고 공연 창작의 새로운 바람이 일고 있다’는 말을 전하였다. 이번 워크숍과 시범사업, 그 간 여러 공연전문가들과의 토론을 수렴하여 2018년부터 지역 어린이 공연 인큐베이터로써 본격적인 역할을 수행하고자 한다.
“공연 안에 클라운들의 재미있는 쇼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신나게 웃으시고 즐거워하시다가, 마지막은 단순히 즐겁게 끝나지 않습니다. 부모님이 아이들을 꼭 안아서 이 힘든, 넓은 세상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강인한 근육을 생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2016 어린이 문화원 봄 시즌 공연 개막작_클라운 타운 이용주 연출 인터뷰 중)
사실 어린이들이 좋아할 만한 공연을 올리는 건 아주 쉽다. TV나 유튜브 속 캐릭터가 등장하는 중독성 콘텐츠, 선물을 남발하며 눈과 귀를 현혹시키는 자극적 소재의 공연을 고민 없이 매주 올리면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입장객이 증가하여 연계되어 있는 타 공간과 동반 상승을 통해 입장 수익 또한 늘어날 것이다. 과정보다 오롯이 숫자로 평가하는 어른들에게 잘했다는 칭찬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쉬운 것은 재미없다. 어찌 됐든 우리는 국내 최초의 어린이 전용극장으로 태어났고 이를 염원하는 동료와 선배님들, 시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에 걸맞은 수준의 어린이 공연예술을 지향해야 한다. 다수에게 소모성 웃음을 파는 가벼운 공연이 아닌, 소수일지라도 찰나의 장면으로 기억되는 감각적인 공연을 하는 극장이고 싶다.
1) 광대 출신인 푸줏간의 새 직원 주인공(도미니크 피용)과 하나뿐인 딸(마리-토르 두낙)의 사랑을 눈치챈 푸줏간 주인(장 클로드 드레퓌스)은 그들의 사랑을 갈라놓기 위한 온갖 계략을 꾸미고 그 과정은 블랙코미디와 달콤한 로맨스의 중간 즈음, 괴상한 색감과 멜랑꼴리한 음악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이 영화는 감수성이 극에 달했던 내 사춘기 시절 강렬한 기억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2) 아동기 문화예술 경험은 아동의 정서를 고양시킴으로써, 아동의 기능을 증진시킬 수 있다고 보고했다. 문화예술교육은 창작자와 창작물, 그리고 감독자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산물로서 (Elliott R. The effectiveness of humanistic therapies: a meta-analysis.In: Cain DJ, editor. Humanistic Psychotherapies: Handbook of Research and Practice. Washington, DC: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2002. p.57-81) 이를 통해 억압된 감정들이 표면화되고, 상상력에 대한 활발한 탐색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아동은 예술 활동을 통해 정서적 어려움을 시각화하고, 스스로에 대한 이해를 보다 활발히 할 수 있다(Freilich R, Shechtman Z. The contribution of art therapy to the social, emotional, and academic adjustment of children with learningdisabilities. Art Psychother 2010;37:97-105.) (문화예술교육이 아동의 행동과 사회기술에 미치는 영향(정연경 외) 중 발췌)
3) ACC는 아시아 과거-현재의 문화예술과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신념이 만나 미래지향적인 새로운 결과물을 생산해내는 국제적인 예술기관이자 문화교류기관입니다. 5.18 민주화 운동(May 18 Democratic Movement)의 인권과 평화의 의미를 예술적으로 승화한다는 배경에서 출발하여 2015년 11월 개관한 ACC는 아시아 문화에 대한 교류·교육·연구 등을 통하여 상호 이해를 증진하고 아시아 각국과 함께 동반성장하고자 설립된 문화체육관광부의 산하기관입니다.(국립아시아문화전당 홈페이지)
4) 극장 공연으로 해외 우수 공연, ACC 레퍼토리 공연, ACC 기획초청공연 등 몰입된 공간에서 관람객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극장 공연
5) 거리극, 퍼레이드 등 야외공연으로 축제, 행사 등 야외 프로그램과 연계하여 관람객들의 유쾌한 참여를 유도하는 붐업 공연
6) 2015년 11월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어린이 문화원 개관 이후 2018년 1월 현재까지 총 130여 작품, 총 645회, 87,847명 관람하였다. 이 기간 중 공연장소별로 어린이극장-야외광장-로비-예술 극장 순으로 진행되었고 장르별로 로비 공연-거리공연-창작공연(극장 극)-기획초청공연(극장 극) 순으로 진행되었다.
7) 전국 방방곡곡에 문화예술의 창의적 기반을 튼튼히 하고 문화예술을 온 국민과 더불어 누리고자 추진되는 사업으로, 우수한 기획프로그램에 대한 지원, 비활성화 문예회관의 운영 활성화, 국립단체 및 민간단체 등의 우수공연 유통 등을 추진하여 수준 높은 문화예술의 나눔을 통해 소외지역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고자 하는 사업입니다.(한국 문화예술 연합회 홈페이지)
8) 2017년 12월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어린이 공연 개발 워크숍 네트워킹 라운지 중 지역 공연 관계자와의 토론 중
9)어린이 공연에 대한 지역, 국내외 새로운 이슈와 발전방향 공유하고 국내 대표 어린이 전용극장으로써 중추적 역할을 수행, 이를 바탕으로 어린이 문화원 공연사업 운영의 중장기 프로세스 구축하기 위한 시범사업. 서울문화재단 관악어린이 창작 놀이터 예술로 상상극장에서 개발된 6작품과 지역 창작공연 쇼케이스, 국립극단, 아시테지, 서울문화재단, 지역 공연 관계자 등이 함께한 네트워킹 라운지 등이 진행됨.
‘어른들도 함께 즐기는 어린이극장’ 을 지향하며 살아내느라 공연문화에 익숙하지 못했던 부모님들에게 일상 속 작은 휴식으로, 어린이들에게는 이 작은 공간에서의 잊지 못할 경험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 소중한 추억으로 기억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