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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작가

문학 이어령 작가

평창동 1호 주민으로, 시대의 지성으로

글쓰기에 전념하기 위해 삶의 터전을 평창동에 세운 '1호 주민'으로서 그는 평창동이 예인들에게 좋은 창작의 안식처로 남기를 희망한다.

"한밤중에 뻐꾸기 소리도 나고, 송홧가루도 날리는, 그야말로 자연의 산속에 집을 지은거지. 시설 외의 지역이라고 전화를 안 놔주는 걸 사비로 전신주를 열 몇 개인가 세웠어요. 그때는 경비 시스템도 없고, 연락수단이 전화뿐이니까 별수 있나요. 그 다음부터 사람들이 입주하기 시작했는데 묘하게도 예술가들이 많이 모여들었어요. 조용하게 집필에 전념하려고 여기 온 사람으로서 도시 속의 예술인들이 고요한 산속에 들어간 느낌으로 살 수 있는 '도시 속의 은둔처'로 가꾸어 나갔으면 좋겠어요.
문인들이 이다음에 은퇴해서 조용하게 창작에 몰두하고 싶을 때, 멀리 시골까지 갈 것도 없이 여기 오면 그게 가능할 수 있게요. 온실처럼 여기가 종로문화를 보존하고 양성하는 곳이 됐으면 좋겠어요."

고두심 배우

대중
예술
고두심 배우

"선한 영향력 고민해야" ··· 고두심, 48년 차 대배우가 사는 법

48년간 '연기'하나만 보고 살아왔다. 수많은 유혹의 손길에도, 엄격한 잣대를 들이미는 시선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걸어왔다. 배우 고두심이 대중에게 꾸준히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선한 영향력’에 대해 확실히 인지한 삶의 자세였다.

"배우가 될 생각으로 서울에 올라온 거라 그 외에는 다른 욕심을 내본 적이 없어요. 어릴 때 가진 꿈을 이뤘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 하고 만족하며 살다 보니 여기까지 왔더라고요.(웃음)"

"인연이요. 다른 건 별 의미가 없더라고요. 지금에 와 보니 내가 가진 걸 오래된 사람들과 같이 나누는 것만큼 행복하고 중요한 건 없다는 걸 절실하게 느끼고 있어요."

장석주 작가

문학 장석주 작가

"시인의 언어는 어디서 오냐고요?"

"사람과 사람 사이 떠다니는 수많은 언어를 잠자리채로 잡듯이 채집하는 게 시인의 일이죠. 그걸 자신의 언어로 바꿔서 세상으로 되돌려주는 게 시이고요. 창작이라고들 하지만, 사실 없는 언어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있는 단어에 새로운 뜻을 덧입혀 다른 의미로 만드는 거죠."

"가끔 '좋은 시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받아요. 그럴 때마다 '해석의 열림을 감당하는 시가 좋은 시'라고 답하죠. 시가 발표된 당대에 그 의미가 다 해명되어서 고갈된다면 그건 좋은 시가 아니에요. 시대가 달라질 때마다 그 시대의 새로운 의미를 담아 해석되는 시, 해석에 고갈되지 않은 시가 좋은 시라 생각합니다."

전인권 가수

대중
예술
전인권 가수

삼청동 뒷길, 노래하는 끝 집 아저씨

"그때 삼청동은 그야말로 달동네였어요. 인디언들이 텐트 치고 옮겨 다니면서 살잖아요. 마치 그런 인디언 마을처럼 그렇게 사는 집이 30가구쯤 있어서 구청에서 단속 오면 싸우고 그랬지요. 우리 집은 그런 쪽은 아니었지만 동네에서 가장 끝 집이었어요. 산에 가까이 있었죠."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강산의 변화가 대여섯 번은 족히 바뀌었을 법한 세월 동안 삼청동 역시 옛 모습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크게 변했다. 그렇지만 동네 안쪽에 자리한 그의 집은 큰 변화가 없었다고 한다. 음악계가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는 와중에도 자신만의 음악적 색채와 신뢰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그의 모습과 묘하게 닮았다.

정종미 한국화가

미술 정종미 한국화가

"그림으로 우리의 진짜 뿌리를 탐구하고 싶었습니다."

"진짜 뿌리는 우리의 자생성에 둬야죠. 그 뿌리를 자양분으로 온전히 흡수하고, 우리만의 진짜 문화를 꽃피워야 세계적인 위치를 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에 돌아가면 '뭘 해야 할까?'에 대한 숭고한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깊이 생각하게 됐고, 작가로서 어떤 길을 가야 하나 고민했죠. 결국 저 같은 사람이 한국 미술사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자문했을 때, 우리 전통문화를 되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이바지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거예요. 외국 가면 애국자가 된다는 걸, 정말 뼈저리게 느낀 거죠."

"자신을 제대로 알려면, 기본적으로 인문적 소양을 갖춰야 하고요. 아이디어 하나를 내는 데에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므로 꾸준함, 성실함, 우둔함 이런 자세를 가지는 게,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숙희 예술경영┃공연기획

연극 김숙희 예술경영┃공연기획

"아이들과 그렇게 함께하는 것이 운명적이란 생각이 들었지요."

2016년 4월 지자체 최초로 종로구가 어린이들만을 위한 아이들극장을 개관했다.
김숙희 예술감독 인생의 결정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극장이다.

"맨날 셋방살이하다가 우리 공간이 생겨서 너무 좋아요. 종로 아이들극장은 전국 최초의 어린이 전용 극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존의 민간극단들이 하기 어려운 공연을 직접 제작하기도 하고, 어린이들의 재능을 발표하는 공연장으로 키워 나가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에게 예술은 향유 그 자체가 아니죠. 아이들에게 예술 활동은 교육이기도 해요. 학교 교육, 가정 교육뿐 아니라 사회를 살아가면서 배워야 할 모든 것을 알아갈 수 있는 공연이 되길 바라요."

최원종 극작가┃연출가

연극 최원종 극작가┃연출가

"보고 나면 따뜻하게 위로받는 그런 공연을 만들고 싶어요."

극단 명작옥수수밭을 이끄는 최원종 연출가는 200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내 마음의 삼류극장>으로 등단해 극작가로 활동해오다 2011년 이후 <에어로빅 보이즈>, <헤비메탈 걸스> 등 자신이 쓴 작품을 직접 연출하면서 연출가로서 두각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작가에서 연출가로 영역을 넓힘과 동시에 어둡고 무거운 주제의 이야기를 탈피해 코미디 장르를 선보인 것 자체가 그에게는 엄청난 모험이나 다름없었다.

종로에서 태어나 평생을 종로에서 살아온 최원종 연출가는 앞으로도 포근한 감동과 훈훈한 웃음으로 가득한 공연을 선보이며 그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어 준 대학로를 떠나지 않을 생각이다.
“보고 나면 따뜻하게 위로받는 그런 공연으로 관객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윤효상 버스커

거리
공연
윤효상 버스커

마로니에를 30년 지킨 버스커, 윤효상 "웃음을 주고 희열을 받죠."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을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목소리가 있다. 무기라곤 오로지 통기타 하나와 인이 박인 목소리뿐. 마로니에 공원을 30년 이상 지킨 버스커, 윤효상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늘 마로니에 공원 한편에 서서 노래와 유머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안긴다.

"30년 넘게 왜 이 일을 하느냐고요? 에이, 안 해본 사람은 그 맛을 모를 거예요. 이유를 굳이 찾는다면야, 미쳤다고 해야 하나. 하하. 정상적인 사람이 매일 길거리에 나와서 노래할 수 있겠어요? 그래도 전 당당하게 말합니다. 직장은 없지만 직업은 있다고요. 따지고 보면 제가 버스킹 1세대거든요."

정재진 미디어 아티스트

영상 정재진 미디어 아티스트

정재진이라는 이름의 브랜드, 공연영상의 패러다임을 바꾸다.

어려서부터 쭉 종로에서 살면서 예술가로서의 꿈을 키워왔기에 종로는 미디어 아티스트이자 영상작가인 정재진에게 늘 소중한 공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특히 꿈과 현실의 양극단을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예술을 향해 끊임없이 구애를 펼치던 대학생 시절, 그녀는 가수 전인권의 삼청동 자택 이웃으로 살면서 인연의 소중함을 체득하기도 했고, 많은 것을 배우고 깨우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제가 하고자 하는 분야에서 대가로서 일가를 이루신 분들을 찾아가 가르침과 조언을 청하기도 하고, 사회운동을 해보기도 했어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서 받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큰 자산이 됐죠. 그리고 사회 약자들에 대해서도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며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됐어요. 오로지 20대 때에만 할 수 있는 그 일들이 현재의 저를 만든 밑천이 된 셈이에요."

김상민 예술경영┃공연기획

영화 김상민 예술경영┃프로듀서

경희궁 길 에무시네마는 어떻게 핫플레이스가 되었나.

"일반경영은 이익 중심으로 움직이기 마련이죠. 하지만 예술경영에는 몇 가지가 더 추가되어야 해요. 이를테면 예술성과 명분, 도의성 같은 것들이죠. 자본만을 좇는다면, 저희가 이 공간에 심고자 했던 본래의 가치를 상실할 수밖에 없겠죠. 예술가들과 상생하면서 예술성을 키우고 색다른 프로젝트들을 이어나간다면, 그 뜻을 함께하고자 하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더 모일테고, 어려운 상황도 타개해나가면서 의미 있는 일들을 지속해서 해나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에무 같은 공간이 많아진다면, 자연스럽게 문화다양성이 뿌리를 내릴 수 있을거라 믿거든요. 최소한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안정적으로 운영해나가는 사례를 보여드리고 싶어요."

백명희 배우

연극 백명희 배우

대학로 베테랑, '액터 닥터'가 되다.

대학로 무대에 선 것만 해도 20여 년이 넘는다. 이만희 작가의 수작 '용띠 위에 개띠' 여주인공으로 8년이 넘게 관객을 만나기도 했다. 그렇게 ‘꽃길’만 걸을 줄 알았던 배우 백명희에게 시련이 찾아온 건 지난 2017년, 그가 오랫동안 가꿔온 극장 이랑씨어터가 문을 닫게 된 후다. 2018년부터 서울대학교 어린이병원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덕분에 이곳에 와서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또 아등바등하거나 조급한 마음도 사라졌어요. 여유로워졌고, 가진 것에 만족하는 순간도 많아졌죠. 그래서 살이 찌긴 했지만, 얼굴도 예전보다 편해졌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있어요. 지금 편안한 이 마음 이대로 끝까지 배우로 살고 싶어요."

심윤경 소설가

문학 심윤경 소설가

종로는 '나의 아름다운 정원'입니다.

제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나의 아름다운 정원'. 1977년부터 1981년 사이에 있었던 한 가족의 이야기를 어린 소년의 시선으로 담아낸 소설이다. 작가 심윤경은 현재는 사직동에 거주하지만 인왕산 아래 오밀조밀 집들이 모여 있던 옥인동에서 태어나 26년간 살았다. 인왕산의 정기를 받으며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을 스스로 요산요수(樂山樂水) 중 전자에 해당하는 인간형이라 자평하는 그는 늘 산이 높은 곳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특히 늘 보고 자랐던 인왕산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그 산이 작가로서의 자신에게 등뼈가 되어주었다고 말했다. 다른 자부심은 없어도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으며 현재도 살고 있는 종로 동네에 대한 자부심은 크다고 하는 심윤경 작가. 그는 종로가 아닌 곳에서 사는 자신을 상상하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여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하더라도 행복의 근원과 함께하고 있어 행복하다는 그는 뼛속 깊이 종로의 딸이었다.

김뻑국 국악인

전통 김뻑국 국악인

"예술인, 연예인, 재주꾼 ··· 여기 종로를 안 거쳐 간 사람이 없어요."

재담의 인기는 예전만 못하지만, 우리나라 전통예술을 더 널리 알리기 위한 노력을 해왔다. 2012년 아리랑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이후, 아리랑을 영어·일본어·중국어로 개사해 불러온 것도 이 때문이다.

종로3가에 있는 예술단의 자리를 그대로 지키면서 국악과 아리랑 강습을 이어가고, 꾸준히 공연을 펼치는 것도 우리나라 전통예술의 명맥이 더 오래 이어지길 바라는 바람에서다.

"국창, 명창은 다 여기 종로에서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예술인, 연예인 등 각종 재주꾼 중에서 여기 안 거쳐 간 사람이 거의 없어요. 나도 그래서 종로를 못 떠나고, 여기서 40년 넘게 있는 거죠. 매주 금요일마다 아리랑 무료 강습을 꾸준히 해왔는데, 배워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해요. 남한테 공짜로 베푸는 것만큼 행복한 일도 없을 거예요."

강병인 서예가

미술 강병인 서예가

자유로움 속에서 글씨와 노닐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 특활반인 서예반에 들어간 것은 수업이 끝난 후에 꿀을 실컷 먹게 해주겠다는 담임 선생님의 말씀 때문이었다. 그러나 꿀보다 달콤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서예의 재미였다. 그저 좋아서 전념할 수 있는 유일한 세계가 거기 있었다.

"딱 다섯 글자로 끝납니다. '좋아하니까'. 그 하나예요. 집안에 서예를 했던 분도 없었고, 동네에서 정식으로 전수받을 수 있는 서당이 있던 것도 아니거든요. 글씨를 쓰고 있으면, 잡념이 사라졌어요. 주변의 다른 누군가와 비교하는 마음도 없어졌고요."

장사익 음악인

음악 장사익 음악인

자연을 바라보며 나와 그대의 행복을 노래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꽃이 펴져 있어도 훑어만 보고 지나가기 바쁘잖아요. 핸드폰 백번 들여다볼 때, 꽃 한 번 쳐다보려나 몰라요. 이런 데 살다 보면 바람 소리도 듣고, 날아드는 새들도 보면서 자연과 사시사철 함께하는 거죠. 봄이면 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여름이면 녹음이 우거져 새파랗고, 가을에는 낙엽이 울긋불긋하고, 겨울에는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어서 크리스마스카드랑 똑같아요. 나 혼자 보기는 아까워요. 이렇게 자연을 보고 사는 것이 제일 행복한 삶이 아닐까 싶어요."

"미국 공연하고 나오니까 어떤 관객은 '당신 노래 듣고 나니까 사이다 한 스무 병은 들이켠 것처럼 시원하다'고 하는 거예요. 울면 개운하잖아요. 요즘 얼마나 살기 팍팍해요. 그런데 공연장 들어가서 손뼉 치면서 한바탕 놀고 후련하게 울고 나오면, 깨끗한 도화지가 또 하나 마련되는 거예요. 그런 힘으로 세상 나가서 또 새로운 그림을 그려 나가는 거죠. 그런 게 예술의 힘이지요."

이시원 극작가

연극 이시원 극작가

모두가 행복한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어렸을 때부터 소설가나 작가를 꿈꿨죠. 아버지가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셨어요. 제가 지은 시, 상상으로 만들어낸 이야기에 언제나 귀 기울여 주셨거든요. 한동안 잊고 있던 기억이었는데 작가가 되어 희곡집을 내려고 하니 문득 아버지 생각이 나더라고요. 옥랑희곡상을 수상하고, 작품집이 나왔을 때도 아버지께서 제일 기뻐해주셨고,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을 때도 제가 가져다 드린 신문을 보고 더없이 행복해하셨죠."

"결혼하고 아이를 가지면서 예술이 제 삶 안에 굉장히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어요.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예술과 인생이 조화롭게 흘러가려면 예술을 하는 과정도 즐거워야 하고, 함께하는 단원도, 제 가족도, 그 작품을 보는 관객도 모두 행복해야 하잖아요."

원장현 대금연주자

전통 원장현 대금연주자

우리의 전통이 찬란하게 뿌리내리길 ···

"사람들은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어서 일찍부터 준비했다고들 하는데, 제가 국악을 시작하던 시기만 해도 한국 경제가 참 어려웠어요. 예술로 먹고살 수 있다는 건 꿈도 못 꿀 상황이었고요. 대금이 좋다는 마음 하나로, 초지일관(初志一貫)해온 거죠. 제가 후학들에게도 항상 강조하는 것이 ‘예술은 상품이 아니므로 절대 욕심이 앞서면 안 된다’는 거예요. 성공하겠다, 명예를 얻겠다는 계산을 앞세우지 말고,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거죠. 저는 대금과 한길을 걸으면서 그 흔한 원망이나 후회 한번 해 본 적이 없어요. 당시에는 번듯한 레슨실이 있던 것도 아니고, 선생님이 정확하게 수업 시간을 지켜주는 법도 없었죠. 그렇지만 셋방살이할 정도로 어려운 환경에서도 제자가 왔다고 밥 먹여주고, 무료로 전수해주시고 하셨어요. 옛 선생님들은 정말 따뜻하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