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에는 궁이나 종묘 같은 조선시대의 역사적인 장소가 많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종로에는 근대 시기를 조명하는 장소도 많은데요. 당시 종로는 시인 윤동주를 비롯한 수많은 문학가가 활동했던 문화예술의 중심지였으며, 모국어마저 잃게 될 위기를 겪는 시기에도 변함없는 근대 문학의 중심지였습니다. 종로에서는 수많은 근대 문인들이 배출됐고, 종로는 그들의 생활 터전이자 교류의 장, 영감을 주는 곳이었죠. <윤동주와 모-던 종로의 시인들> 전시를 통해 1930년대 중반부터 1940년대 전반까지 종로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윤동주, 정지용, 이상, 백석 등 근대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들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근현대 시기 종로의 모습과 그들의 활동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 . .
시인이 마주한 종로의 모습
윤동주의 종로와 경성
전시는 ‘윤동주의 종로와 경성’, ‘윤동주가 사랑한 시인들’, ‘모던 시인 종로 산책기’ 총 3가지 테마로 구성돼 있습니다. 윤동주는 1938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해 경성 유학을 시작했고, 1941년 5월부터 9월까지 종로 누상동에서 하숙하며 수많은 작품을 탄생시켰습니다.
먼저 ‘윤동주와 함께 걷는 길’을 통해서 윤동주의 연보와 동시대 주요 사건을 간단히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경성 시가 지도’(1930~1940년대)를 통해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윤동주의 통학길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가 통학길에서 어떤 영감을 받았는지 상상해보는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이밖에 윤동주 시인의 <종시>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대형 스크린 영상 작품도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종점이 시점이 된다. 다시 시점이 종점이 된다. 아침, 저녁으로 이 자국을 밟게 되는데 이 자국을 밟게 된 연유가 있다. 일찍이 서산대사가 살았을 듯한 우거진 송림 속, 게다가 덩그러시 살림집은 외따로 한 채뿐이었으나 식구로는 굉장한 것이어서 한 지붕 밑에서 팔도 사투리를 죄다 들을 만큼 모아놓은 미끈한 장정들만이 욱실욱실하였다. 이곳에 법령은 없었으나 여인금납구였다. 만일 강심장의 여인이 있어 불의의 침입이 있다면 우리들의 호기심을 저욱이 자아내었고, 방마다 새로운 화제가 생기곤 하였다. 이렇듯 수도생활에 나는 소라 속처럼 안도하였던 것이다.
<종시>는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쓴 작품으로 등하굣길에 그가 만난 경성의 풍경을 상세히 묘사한 작품입니다. 영상 작품을 통해 <종시>를 감상하며 당시 경성의 풍경을 상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영상 작품의 맞은편에는 시민들이 녹음한 시를 들어볼 수 있는 <시인의 방>이 마련돼 있습니다. 눈을 감고 사람들의 목소리로 녹음된 모던 시인들의 시를 들어봤습니다.
전시장 한편에는 윤동주가 마주한 종로와 경성의 모습을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요. 윤동주의 시 <종시와> 그와 함께 하숙했던 정병욱 교수의 저서 <잊지 못할 윤동주>을 바탕으로 구성한 공간으로 시인의 작품에 등장하는 경성, 종로의 장소를 사진과 간단한 설명으로 한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무렵의 우리의 일과는 대충 다음과 같다. 아침 식사 전에는 누상동 뒷산인 인왕산 중턱까지 산책을 할 수 있었다. 세수는 산골짜기 아무 데서나 할 수 있었다. 방으로 돌아와 청소를 끝내고 조반을 마친 다음 학교로 나갔다. 하학 후에는 기차 편을 이용했었고, 한국은행 앞까지 전차로 돌아와 충무로 책방들을 순방하였다. 지성당, 일한서방, 마루젠 군서당 등, 신간 서점과 고서점을 돌고 나면 후유노야도나 남풍장이란 음악다방에 들러 음악을 즐기면서 우선 새로 산 책을 들춰보기도 했다. 오는 길에 명치좌(지금의 명동 예술극장)에 재미있는 프로가 있으면 영화를 보기도 했다. 극장에 들르지 않으면 명동에서 도보로 을지로를 거처 청계천을 건너서 관훈동 헌책방을 다시 순례했다. 거기서 또 걸어서 적선동 유길 서점에 들러 서가를 훑고 나면 거리에는 전깃불이 켜져 있을 때가 된다. 이리하여 누상동 9번지로 돌아가면 조 여사가 손수 마련한 저녁 밥상이 기다리고 있었고 저녁 식사가 끝나면 김 선생의 청으로 대청마루에 올라가 한 시간 남짓한 환담 시간을 갖고 방으로 돌아와 자정 가까이까지 책을 보다가 자리에 드는 것이었다.
두 작품과 사진을 통해 학교를 마치고 경성 시내의 서점을 순회하며, 가끔 영화를 보거나 음악다방을 가는 청년 윤동주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경성 유학 시기는 그가 어느 때보다 문학에 대한 열정이 넘치던 때로 대표작인 <별 헤는 밤>, <서시>, <자화상> 등이 이 시기에 탄생했다고 합니다.
무한한 영감을 준
윤동주가 사랑한 시인들
두 번째 테마에서는 윤동주 시인이 학창 시절 사랑했던 시인 중 1930년대 종로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정지용, 이상, 백석과 그들의 대표작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윤동주는 <정지용 시집(1935)>을 정독하고, 백석의 시집 <사슴(1936)>을 필사했으며 이상을 비롯한 당시 시인들의 작품을 섭렵하고 스크랩했습니다. 이 시기에 읽은 작품은 윤동주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그가 연희전문학교 문과 진학의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정지용(1902~1950)은 한국 문단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시인으로 불립니다. 종로구 원서동에 있었던 사립휘문고등보통학교(현 휘문고등학교)의 영어 교사로 16년간 재임했는데요. 그의 첫 시집 <정지용시집(시문학사, 1935)>은 당시 많은 문학도의 사랑 받았고 윤동주 역시 그를 동경해 <정지용시집>을 구입해 외우고, 이를 바탕으로 시 창작 훈련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정지용은 해방 후, 윤동주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 초간본에 서문을 쓰기도 했습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1910~1937)은 한국 아방가르드 문학의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는 종로구 사직동에서 출생해 통인동 큰아버지 집에서 3살 때부터 20여 년간 거주했습니다. 현재 그 집터 일부에 이상과 그의 작품을 기억하는 공간인 ‘이상의 집’이 남아있는데요. 윤동주는 이상을 예술가로서 높이 평가했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이상의 글을 읽어보라고 권했다고 합니다. 윤동주의 시에도 이상의 영향이 나타나는데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의 회고에 따르면 윤동주는 유년 시절 이상의 작품을 스크랩했다고 합니다.
백석(1912~1996)은 아름다운 우리말 어휘를 다양하게 사용해 모국어의 확장을 보여주면서도 감정이 절제된 시어로 고유한 현대성을 획득한 시인으로 평가됩니다. 그는 기자 생활을 하며 1936년 25살의 나이에 33편의 시를 모아 첫 시집 <사슴>을 100부 간행했고 윤동주는 이 시집 전체를 원고지에 필사했다고 합니다.
과거로의 시간 여행
모던 시인 종로 산책기
1930년대 예술가들이 즐겨 찾던 다방은 단순히 커피와 음료를 파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음악을 듣고 예술을 논하며 이른바 모던한 생활을 향유하는 커뮤니티의 역할을 했는데요. 다방의 운영자들도 문인, 미술가 등 예술가들이 많았고 이상 역시 다방 운영에 관심을 가지고 다방을 인수해 운영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다방은 당시 ‘끽다점’, ‘찻집’, ‘티룸’ 등으로 불렸고, 외부 생활공간과 구분되며 외래 문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그중 ‘낙랑파’라는 1930년대 소고동에서 가장 유명했던 다방입니다. 고구려의 지명을 따와 이름을 지었는데 이름과 상관없이 다방의 이미지는 이국적인 정취가 혼합돼 있었다고 해요. 김기림, 이상, 박태원, 김소운, 구본웅 등 당대 문인들이 단골로 드나들며 이야기를 나눴던 장소입니다.
이상은 1933년 종로 1가 청진동 입구에 다방 ‘제비’를 개업했습니다. 그러나 경영난으로 얼마 가지 못해 문을 닫게 됐는데요. 박태원이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 자전적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과 ‘조선일보’에 실린 박태원의 글 <제비(1939)>를 보면 당시 문학계의 모던 보이들이 자주 드나들던 다방 문화와 이상이 운영하던 다방 제비의 모습이 잘 묘사돼 있습니다.
. . .
눈과 귀로 즐길 수 있는 전시인 <윤동주와 모던-종로의 시인들>. 전시에 방문해 많은 시인이 활동했던 모던 종로의 모습을 살펴보고, 시인들이 근대 도시를 마주하며 느낀 생각과 감정을 상상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윤동주와 모던-종로의 시인들>
・ 전시기간 : 2023. 6. 1(목) ~ 7. 30(일)
・ 장소 : 무계원 별채 전시실(서울시 창의문로 5가길 4, 2층)
・ 관람시간 : 10:00 ~ 17:00 *월요일 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