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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 낭독음악극 <통인동 128번지> 리뷰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2-09-12 17:07:40
  • 조회 : 1909

 

 

1919년 3·1 운동 이후 비폭력 노선의 한계를 넘고자 각지에서 무력 투쟁이 전개됐습니다. 영화 <암살>로 조명받은 의열단장 김원봉, 청산리 전투로 유명한 북로군정서 총사령관 김좌진, 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의 총사령관 지청천은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유능한 지휘관입니다. 세 사람의 공통점은 또 있습니다. 바로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라는 점인데요. 종로픽플이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무장 독립 전쟁의 토대를 닦은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선생 일가와 그들의 치열한 삶을 담은 낭독음악극 <통인동 128번지>를 소개합니다.

 

 

 

왼쪽부터 김원봉, 김좌진, 지청천

 

 

이회영 선생 일가는 이른바 '삼한갑족'이라 일컬어지는 백사 이항복의 11대손으로 8대에 걸쳐 판서를 배출한 명문가였습니다. 또한, 서울 명동 일대의 땅을 대부분 소유하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조선 최고의 갑부이기도 했죠. 하지만 여섯 형제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안온한 삶을 포기하고 모든 재산을 매각해 만주로 망명했습니다. 국외에 독립운동 근거지와 군대를 만들어 나라를 되찾으려는 계획이었죠. 이들이 서간도에서 운영한 신흥무관학교는 유수의 군사 인재를 육성한 요람으로 일제강점기 무장투쟁의 중심부라고 평가받는 곳입니다. 1920년 폐교될 때까지 약 10년 동안 양성한 3,500여 명의 독립군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비롯해 주요 항일 전투에서 주역으로 활약했습니다. 대표적 단체로는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 의열단과 광복군이 있습니다.

 

 

 

이회영 선생과 여섯 형제 초상

 

 

이 같은 우당 가문의 활약은 종로구 통인동 128번지와 인연이 깊습니다. 통인동 128번지는 이회영 선생이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다시 국내에 잠입했을 때 숨어 지냈던 제자 윤복영의 집이자 광복 후 가문의 본적지로 자리매김한 곳입니다. 낭독음악극 <통인동 128번지> 는 이회영 선생 일가가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치며 통인동 128번지와 인연을 맺은 그때 그 격동과 암울의 시대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낭독음악극 <통인동 128번지>
담담하게 역사의 숨 가쁜 현장을 전하다

 

 

 

 

지난 8월 10일부터 11일까지 창신아트홀에서 공연된 낭독음악극 <통인동 128번지> 는 이회영 선생과 아내 이은숙 여사의 독백과 대화를 위주로 진행됐는데요. 배우들은 큰 동작 없이 단호한 표정과 담담한 목소리로 극을 이끌어 갔지만 지루함을 느낄 새는 없었습니다. 극 사이사이 음악을 통해 인물의 심리를 극적으로 드러내고 해설자가 역사적 사실을 때로는 재치 있게, 때로는 엄숙하게 요약하기 때문입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두 사람의 이야기는 관객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어설픈 이야기를 만드는 것보다 이분들 삶을 정확히 표현하는 게
어떤 드라마보다 감동적인 요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 정대경 삼일로 창고극단 대표 인터뷰 중

 

 

실제로 극을 제작할 때 가장 신경 쓴 것은 고증이라고 합니다. 극에 나오는 역사적 사실은 황원섭 우당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 상임이사를 통해 감수받았습니다. <통인동 128번지> 를 구성·작곡·연출한 정대경 삼일로 창고극단 대표는 자신의 역할을 각본이 아닌 구성으로 설정한 것도 우당 평전과 이은숙 여사의 자서전 『서간도시종기』 등을 엮는 작업을 주로 했기 때문이라 밝혔습니다.

 

 

 

해설을 맡은 이동학 배우

 

 

 

자유와 평등을 소망한 인간
이회영을 만나다

 

 

여러분에게 우당 이회영 선생은 어떤 사람인가요? 제게는 강건한 독립투사로서의 이미지가 강했는데요. <통인동 128번지> 에서 그가 독립운동에 헌신하게 된 결정적 계기인 개혁 신념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우당은 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넘어 사람 대 사람으로 살아가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려는 의지를 품었습니다.

 


이제 제왕의 시대는 갔고 사민 자유평등의 시대가 왔으니
우리의 전통과 습성을 생각하면서 시대 조류에 따라
새 나라 건설 이론을 확립해야 한다.

- 『우당 이회영 약전』 중

 

 

이회영 선생은 청년 시절 서양의 신학문을 접하면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꿈꿨고, 그 바람은 스러지는 민족의 운명 앞에서 독립운동으로 전환됐습니다. 그에게 독립운동이란 인간의 자유, 민족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결단이었습니다. 이회영 선생을 흔히 아나키스트(anarchist)라고 부르는데요. 아나키스트는 대개 무정부주의자로 해석하지만, 정확한 의미는 권력에 의한 강제적 지배를 부정하는 자유공동체주의자를 의미합니다. 극에서도 이회영 선생의 아나키스트 활동을 둘러싼 오해를 바로잡습니다. 우당이 1920년대 초 이래로 내세운 아나키즘 노선은 새로운 사상의 수용이 아니라 평생 그가 추구한 혁명 정신과 독립운동 경험이 어우러져 생겨났다고 언질을 주면서요.

 

 

 

우당 이회영 선생 역의 박형준 배우

 

 

 

통인동 128번지에 서린 애달픈 사연

 

 

사실 우리는 이회영 선생 일가가 어떤 각오를 하고 이역만리 타국 땅으로 떠났는지, 얼마나 고초를 당하며 고생했는지 그 실상을 완전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 극에서는 통인동 128번지에 얽힌 아련한 가족사를 소개함으로써 그들이 독립투쟁을 하며 겪은 외롭고 빈곤한 생활상을 소환했습니다. 1925년 이회영 선생의 아내 이은숙 여사는 부족한 자금을 조달하고자 태중에 아이를 가진 채 홀로 밀입국했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감시로 사정이 여의치 않자 고무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고 유곽 삯빨래를 하는 등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고 돈을 벌어 중국으로 보냈죠.

 

 


일생의 몸을 광복 운동에 바치시고 사람이 닿지 못하는 만고풍상을 무릅쓰고
다만 일편단심으로 '우리 조국, 우리 민족' 하시고 지내시다가
반도 강산의 무궁화꽃 속에 새 나라를 건설치 못하시고
중도에서 원통 억색히 운명하시니 슬프다.

- 이회영 선생의 순국 후 이은숙 여사가 쓴 죽문 중

 

 

희망도 잠시, 애달프게도 1925년을 기점으로 이회영 선생과 이은숙 여사는 영영 작별하게 됐습니다. 우당은 극심한 궁핍에도 멈추지 않고 독립운동을 이어갔습니다. 중국 상해에서 남화한인연맹을 결성하고 남화통신을 발행하는 한편, 흑색공포단을 조직했습니다. 이어 만주로 돌아가 지하공작망을 조직하고자 했죠. 그러나 1932년 일제 관동군사령관 암살에 나섰다가 밀정의 밀고로 해상에서 붙잡혀 순국하고 맙니다. 당대의 독립운동이 수많은 희생과 맞바꾼 것임을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이은숙 여사 역의 신서옥 배우

 

 

 

남은 자들에게 던지는 인생의 물음

 

 

이회영 선생 일가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또 투쟁한 역사는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러 시사점을 남깁니다. 환경의 차이는 있지만 삶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집니다. 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우리 몫이죠. 물론 과거와 비교할 때 국가를 구성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 뒤바뀐 만큼 우당처럼 대의를 위해 앞장서는 것만이 훌륭하고 완전한 인생이라 단정할 수는 없겠습니다.

 

 


청년 이회영이 물었다. 한 번의 젊은 나이를 어찌할 것인가.
눈을 감는 순간 이회영은 예순여섯의 일생으로 답했다.

- 낭독음악극 <통인동 128번지> 중

 

 

 

우당 이회영 선생과 아내 이은숙 여사 실제 모습

 

 

그러나 낭독음악극 <통인동 128번지> 속 이회영 선생과 이은숙 여사의 삶을 통해 그들의 발자취는 제가 훗날 중대한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을 때 의미 있는 본보기가 되리라 확신했습니다. '역사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고, 미래를 제시하는 나침반'이라는 경구가 있습니다. <통인동 128번지>를 관람한 하루는 과거가 있기에 현재도 있음을 실감하면서 스스로 더 겸손해진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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