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순간부터 생이 다할 때까지 변화를 거듭하는 인간처럼 도시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은 채 번화하고 때론 쇠퇴하며 그 수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시의 생애 안에서 인간은 서로 상호작용하고 흔적을 남기며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있는데요. 종로문화재단은 이러한 도시의 모습을 남기는 <도시기록가 클럽> 1기를 운영했습니다. 지난달 성과공유회로 활동을 마무리 한 김민주, 이경원, 이희윤 시민기록가와 멘토 이경민 도시기록가를 만나 뒷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시선이 머문 도시의 장면을 수집하다
<도시기록가 클럽>은 기록 분야 전문가 멘토 4인이 프로그램 기획 과정부터 함께 참여했습니다. 비교적 크게 조명되지 않았던 종로5·6가동을 대상지로 선정한 가운데 지난 9월 선발된 20명의 1기 시민기록가들은 도시기록가와 팀을 이뤄 9월 21일부터 11월 15일까지 약 2개월간 11회의 활동을 진행했는데요. 활동에 참여한 김민주, 이경원, 이희윤 시민기록가는 그동안 해 온 다양한 분야에서의 경험을 도시 기록과 연계해 보기 위해 참여했다고 전했습니다.
김민주 동양화 작가로서 도시공간을 소재로 한 작품에 관심을 두고 있었어요. 지역을 관찰하고 공간을 탐구하는 기록 활동이 지금 하는 작품 활동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신청했습니다. 저는 서울에서 태어난 후 한번도 서울을 벗어나 살아본 적이 없어요. 어렸을 때 어른들로부터 서울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들었는데 편견과 선입견을 모두 잊어버리고 처음 서울을 마주한 외부인의 시선에서 탐방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희윤 건축을 전공한 후 도시재생사업 등 도시와 관련한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개인적으로도 시간이 날 때마다 지역의 사람들을 기록하는 활동을 해 왔는데 <도시기록가 클럽>에서 이를 발전시킬 수 있을 것 같아 신청했습니다. 건물과 거리의 모습, 그 안에 스며들어 생활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기록해 왔는데 이러한 작업이 연결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번 활동을 진행했습니다.
이경원 대학원에서 인류학을 전공하면서 기록을 찾아보고 만드는 것에 익숙했어요. 기록을 콘텐츠화 하는 이번 작업이 연구에서의 기록 활동과 다를 것 같아 경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인류학을 전공하면서 장소는 물론 장소를 구성한 사물에도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됐는데요. 이번 활동에서도 도시에 남겨진 사람 이야기를 찾기 위해 노력했어요.
공통교육 이후 진행된 그룹별 워크숍에서 도시기록가 이경민 멘토의 조언에 따라 지역을 조사하고 연구・탐방하는 실습이 진행됐습니다. 이번 <도시기록가 클럽>은 기록의 과정과 형식에 특별한 제한을 두지 않았는데요. 팀원들은 의견을 모아 각자 탐방할 장소를 정하고, 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노션(Notion) 앱으로 기록한 후 공유했습니다. 시민기록가들은 종로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나만의 방식으로 이를 읽어 내면서 도시를 보다 다층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는데요. 이경민 멘토 역시 구체적인 피드백을 주기보단 다양한 기록 사례를 보여주면서 시민기록가들이 기록에 관한 생각을 확장하고, 소통 과정에서 영감을 얻도록 도왔다고 합니다.
이경원 여러 기록 방식 중 저는 연구 과정에서 많이 경험했던 인터뷰를 선택했어요. 처음에는 '단추의 경로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광장시장과 동대문종합시장 부자재 가게를 다루려고 했지만 상인 분들과 인터뷰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첫 모임 때 팀원들과 함께 충신시장 일대를 탐방했는데 우연히 주차장을 운영하시는 사장님을 통해 종로 역사를 듣게 됐어요. 종로 토박이이신 그분을 통해 여러 정보를 얻었고 원단 창고 사장님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주택가처럼 보였던 충신시장 주변이 모두 창고라는 것을 알았어요. 활발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원단 창고밖에 없어 유령도시처럼 느껴진다는 말씀에 현재 남은 옛 모습을 찾아보자는 생각으로 충신시장 일대를 주제로 삼았어요.
이희윤 저는 예전부터 종로5·6가동의 동대문, 을지로 지역이 무척 흥미로웠는데요. 오피스 상권이 즐비한 광화문 일대와 달리 옛 주민들과 외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규모가 큰 광장시장에 비해 충신시장은 그 크기는 작지만 기존 주거지 또는 일터로 오가는 사람들, 외부에서 온 사람들, 외국인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혼재돼 생활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또한 예전에 1972년 충신동에 세워진 목욕탕 '충신탕'에 관한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원단 창고로 사용되고 있는 그 건물을 무척 강렬하게 본 기억이 있어 이 일대를 기록 장소로 선정했습니다.
김민주 우리가 여행할 때 계획에 따라 움직이기도 하지만, 종종 흥미로운 광경을 마주하면 그 광경에 따라 이동할 때도 있잖아요. 그런 것처럼 조금은 즉흥적이지만 제가 다니는 주변을 살피면서 신기한 장면이 나오면 그 길을 따라 이동하는 방식으로 탐방했어요. 길 위에 무엇이 있는지,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유심히 살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경험은 충신시장과 꽃 시장 사이에 원형 교차로를 따라간 것인데요. 코로나 이후 도로 정비가 이뤄지면서 5거리 이상인 곳은 모두 원형 교차로로 바뀌었어요. 그러다 보니 새로 생긴 원형 교차로 안에 과거에 있었던 길들이 혼재돼 있는데 나뉘어진 각각의 길을 따라가면서 마주한 풍경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상상해 보기도 하고 조사를 통해 제가 읽은 이야기가 맞는지 아닌지 확인해 봤습니다.
이경민(멘토) 처음 도시 기록을 시작할 때 '수집'의 개념에서 접근했습니다. 무엇이든 일정 시간 동안 모으다 보면 특정 주제와 키워드로 분류할 수 있게 되는데 도시를 수집하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저는 팀원들 각자가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한 콘텐츠들을 어떤 방식으로 연결했을 때 확장할 수 있을지, 그 과정에서 내가 보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길 바랐어요. '과정으로서의 기록'이란 콘셉트로 흩어져 있는 것들을 함께 모으고 나열한 뒤 그것을 연결하고 고민하는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기록의 유형에 제한을 두지 않는 이번 프로젝트처럼 미완성이긴 해도 그 과정을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직접적인 조언보단 기록의 다양한 방식과 적절한 사례, 레퍼런스를 전달하고 이를 참고해 발전시켜볼 수 있도록 했어요. 저 역시 함께 참여해 팀원들로부터 여러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함께라서 발견할 수 있었던 도시의 가치
시민기록가들은 이번 활동을 통해 개인의 삶과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도시의 구성요소와 사람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같은 장소를 보더라도 나와 다른 방식으로 살피는 팀원들의 시선에서 종로5·6가동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요. 기존에 갖고 있던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도시를 구성하는 나 자신을 이해해 보는 시간으로 이어졌습니다.
이희윤 저는 처음부터 충신시장 일대를 다루겠다는 목표가 확고했는데 이곳에서 시작해 조금씩 주변으로 넓혀가며 도시를 관찰할 때, 팀원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경원 님은 마을 사람들의 커뮤니티와 네트워킹을 바탕으로, 민주 님은 길 위의 도로에서 마주한 오브제들을 따라가며 도시를 기록하셨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들이 건축물과 역사를 중심으로 살펴본 제게 더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도와줬고 각자 모은 기록들이 한데 모이니 더 다채로운 이야기들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경원 연구 활동을 주로 해와서 그런지 정보나 구술처럼 증명된 기록만이 유효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무작정 길을 따라 걸으며 사유해 보고 이를 자기 방식으로 해석하는 민주 님의 기록을 보면서 공간을 보는 사람의 상상력과 관찰 그 자체만으로 기록으로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또 인터뷰나 관찰은 혼자 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과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것이 뜻깊었어요.
김민주 특별한 목표를 두지 않고 기록 활동을 하다 보니 예상치 못한 일도 많았어요. 한번은 기독교와 연관이 깊은 연지동을 탐방했는데 기독교회관, 기독교 100주년 기념관이 자리한 만큼 거리에 종교적인 색채와 분위기가 드러나지 않을까 예상했어요. 하지만 생각과 달리 조명을 다루는 전기, 전자 가게들이 주를 이뤘고 그 안에서 저만 외부인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처럼 의외의 발견을 할 때 기록 활동이 더욱 즐겁게 다가왔습니다. 평소에도 길을 돌아다니고 감상을 남기는 일을 자주 해왔는데 이제는 그걸 정리하고 보여줄 방법을 고민하게 된 것 같아요. 구술이나 사진을 벗어난 다양한 방식으로 제 주변의 풍경, 제가 다니는 길, 거기서 마주한 사람들을 남기고 싶어요.
이경민(멘토) 많은 사람들이 '기록'이란 형태를 가지고 정형화돼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번 활동처럼 우리가 함께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기록을 만들 수 있어요. 저희는 모일 때마다 3시간 이상 대화를 했는데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깨닫는 과정이 텍스트를 쓰거나 사진으로 남기는 것만큼 인상적이었습니다. 민주 님은 평소 습관처럼 스마트폰 앱으로 자기가 다니는 길을 기록하고 그 안에서 본 풍경과 생각을 기록했는데 일상 속에서의 낯선 것들을 찾는 시도가 굉장히 신선했습니다. 인터뷰를 주로 한 경원 님은 정말 세세한 이야기들까지 남겨 주셔서 재밌게 봤고, 희윤님은 건축을 전공하신 만큼 같은 건물의 도면을 기록하셨는데 건축물마다 가지고 있는 각각의 특성, 개성을 지나치지 않고 함께 표현해 주셔서 자세히 볼 수 있었고 저와 다른 방식으로 건물을 보는 점도 흥미로웠어요. 정제된 결과물을 만드는 과정은 없었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더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온 것 같아요.
한편, 이번 활동은 도시 발전 대한 고민으로도 이어졌습니다. '도시재생'이라는 명목으로 이뤄지는 거듭된 변화가 종로가 가진 특색을 지우는 것 같아 아쉽다고 전했는데요. 과거와 현재를 잇는 종로의 다양성을 간직하고 각 지역이 여러 세대에 거쳐 쌓아온 역사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방식으로 발전하길 바란다고 전했습니다.
김민주 예전에는 각 동네마다 느껴지는 분위기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개성이 사라진 것 같아요. 저는 어렸을 때 송파구에서 살았는데 은평구에 있는 할머니 댁에 가려면 늘 광화문을 지나야 했어요. 그래서 시간에 따라 광화문로가 좁아지는 과정을 봤거든요. 거리의 외관도 일률적으로 바뀌고 골목골목 품고 있었던 이야기도 사라져 버렸죠. 제가 어렸을 때 갖고 있었던 종로에 대한 로망도 지워지는 것 같아 더 이상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희윤 어머니께서 묘동 단성사 근처에서 사셨는데 지금은 너무 많이 변해 모르겠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도로 체계 자체가 바뀌었다 보니 예전 모습을 인식하기가 어렵게 됐죠. 인사동 쌈지길도 10년이 채 되지 않은 기간 동안 정말 많이 변했어요. 잘 닦인 길 덕분에 목적지를 금방 찾을 수 있게 됐지만 갖고 있었던 매력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 길을 헤매면서 보는 풍경들도 있고 그 자체가 도시를 즐기는 방식이 될 수 있는데 그곳에 방문한 사람 모두 획일적으로 같은 길을 걷게 된 거죠.
이경원 종로의 익선동과 북촌은 젊은 20~30대들이 주로 찾으면서 한옥과 젊은 감성이 담긴 아기자기한 가계들이 주를 이루는 반면 탑골공원은 중장년층의 문화 공간으로 거듭났어요. 저는 고향이 부산이라 종로를 늘 서울의 시그니처 혹은 관광지로만 생각했는데 이번 활동을 통해 이곳도 긴 시간 이어진 사람들의 일상으로 생활 터전이 만들어졌고 구석구석 안에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그러한 개성이 존중되는 방향으로 발전했으면 좋겠습니다.
이경민(멘토) 사실 필연적으로 생기는 변화를 저희가 막을 수는 없어요. 다만 ‘예전의 종로가 어땠는가’라는 질문을 잊지 말고 그때 떠오른 이미지와 답을 지켜가는 방향으로 변화해야 할 것 같아요. 개인적으론 종로가 가진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제대로 드러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정동이나 창신동에서 만날 수 있는 현대사의 기록 등 여러 방면을 콘텐츠로 다루고 보여줌으로써 다양한 매력을 전달했으면 좋겠습니다.
도시기록가 이경민 멘토는 도시를 바라보는 행위를 통해 도시의 삶에 대한 의미와 중요성을 다시 돌아보고 자신만의 관점과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전했습니다. 시민기록가들의 신선한 기획과 시선으로 진행된 이번 활동으로 종로5·6가동에 숨은 다채로운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요. 올해 1기 활동을 마친 <도시기록가 클럽>이 앞으로도 종로를 새롭게 바라보는 기회로 이어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