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앞 열 하나 동네'. 소설 제목 같기도, 연극 제목 같기도 하다. 창덕궁 앞에 무슨 동네가 그리 많을까? 그 '동네'란 말 다음으로 이어질 이야기들이 듣고 싶어진다. 이토록 상상력을 자극하는 긴 이름은 종로구 어느 지역주민협의체의 공식 명칭이다. 운니동, 와룡동, 경운동, 권농동, 익선동, 돈의동, 낙원동, 봉익동, 묘동, 종로2가동, 종로3가동으로 형성된 '열 하나 동네'는 동네 이름들은 낯설어도 서울의 원형인 한양의 역사와 근현대사의 중요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서울 최초의 도시공원인 탑골공원이 19세기 말에 생겼고, 일제강점기에는 근대한옥지구인 익선동이 만들어졌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당시 최첨단 주상복합건물이었던 낙원상가도 지어졌다. 다양한 전통문화 관련 산업들이 오랜 시간 발전되어오면서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중첩되어 소통하고 있는 곳이다.
이런 의미 있는 동네에 꾸려진 지역주민협의체라니! '창덕궁 앞 열 하나 동네'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베니스와 로마에서 건축설계와 도시계획을 공부했던 김선아 대표는 20여 년 전부터 서울의 심장부인 종로의 도시재생에 남다른 접근방식과 기획 아이디어를 불어넣어 왔다. 시설물이나 건축 설계 위주의 하드웨어 중심적인 도시설계가 아니라, 사람과 문화가 중심에 놓이는 도시재생을 강조해왔다. "건축적으로 겉모습만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한계가 있죠. 건축이란 사람과 그 사람을 위한 삶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특히 도시재생을 위해서는 그 지역 일대가 안고 있는 역사적, 시대적, 문화적 콘텐츠를 먼저 꿰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상점이 있고 어떤 사람들이 모여 있고 드나드는지, 개개인의 입장과 이해관계가 어떻게 얽혀 있고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아가면서 실질적인 산업 활성화를 모색하는 개발과 재생사업으로 이어져야 해요." 이런 생각은 건축가로서의 시각을 180도 바꾸어 놓았다. 지금의 김선아 대표에게 '도시재생'은 사람과 시간, 일과 생활, 길과 동선 등의 소프트웨어로 마름질하고 휴먼웨어로 바느질해가며 동네에 어울리는 옷을 지어내는 일이다.
2012년 <낙원핵심상징개선사업>이라는 마스터 플랜 작업을 시작으로 <돈의구역 리모델링 활성화구역 건축기본계획>과 <종로 주얼리산업 활성화 마스터플랜 작업>에 이어 2014년부터 2년간 <낙원상가, 돈화문로 일대 활성화를 위한 도시재생 전략계획>까지 여러 사업의 총괄계획가로 활동하면서 김선아표 도시재생의 꿈을 심어왔다.
"여기는 낙원상가와 종묘, 창덕궁, 종로에 둘러싸여서 도심 속 섬 같은 곳이에요. 그러나 이 안에는 보석 같은 이야기, 길, 사람들, 풍경이 숨어 있죠. 바라는 대로 동네 풍경을 만들고 다듬어가는 일은 단숨에 결과를 보여줄 수 없어요. 주민들과 커뮤니티를 만들고 협치를 해나가는 과정엔 시간과 열정이 필요합니다." 낙원상가 일대 지역조사를 하면서 대를 잇는 가업 이야기, 국악인들의 인생 이야기 등 수많은 삶을 만났고,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었다는 김선아 대표는 광대한 스케일의 휴먼웨어를 만나고 나서야 진짜 필요한 개발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단다. 동네 잡지 <창덕궁 앞 열하나 동네>를 창간하고 동네 축제 <시경유람>을 기획한 단초였다.
'단순한 길 정비 이상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도시재생 계획을 세우면서 시작된 종로구와의 인연이 작업실을 운니동으로 옮겨오게 했고, 지역주민협의체를 만들게 했고, 매년 잡지도 만들고 축제까지 벌이게 했다. '열 하나 동네'와 함께 인생 후반부를 새롭게 시작한 셈이다. 이웃끼리 서로 알아갈 플랫폼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만드는 잡지는 지역에서 오랫동안 사진을 아카이빙해온 그룹(메모리K)이 사진을 담당하고, 익선동의 그래픽 디자이너 그룹(오디너리 랩)이 디자인을 맡아주었다. 2호부터는 지역주민의 후원회비가 모이고 배포처도 하나둘 늘어 현재는 약 80여 군데가 되었다. 서로에게 필요한 품들을 내어주며 '열 하나 동네'만의 색과 모양을 찾아가고 있다. 여기에 김선아 대표의 꺼지지 않는 열정과 추진력이 더해져 함께 동네의 표정을 바꾸어가는 중이다.
2016년부터 매년 가을 열리는 축제 <시경유람時景遊覽>은 '시간의 경관을 유람'하는 특별한 경험을 선물한다. 김선아 대표가 직접 기획하는 축제의 면면 속에는 유학 중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코디네이터로 활동하면서 경험하고 축적한 문화적 감성이 녹아 있다. 서울시의 아름다운 길을 소개하는 스토리텔링 사업과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옛 거리에 숨은 이야기를 전해주는 '보이는 연극'은 기존 문화해설 프로그램과는 차별화된 새로운 시도였다. 동네 몇몇 포인트에서 뮤지션들이 버스킹을 하며 이동하는 이머시브형 '사운드 스케이프'도 이채로운 프로그램이었다. 버스커들을 따라 이동하는 사람들 밀도는 어떻게 될까? 사람들이 선호하는 길은 어디일까? 이런 이벤트가 지속된다면 이동 동선에 따라 상가들도 변화하고 길이 정비되지 않을까? 만들어놓은 공간에 사람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발길과 흐름 따라 사람에 맞춘 도시로 다시 태어나는 것! 김선아 대표의 도시재생 테마인 '마이크로 어버니즘(Micro Urbanism)'이 빈틈없이 버무려진 기획이었다.
종로의 역사와 산업자원들을 '살아있는 문화'로 만들기 위한 김선아 대표의 여정은 현재진행형이고, 어쩌면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일지 모른다. 속도와 경쟁, 새것과 개발이 중심어가 된 지 오래인 오늘날에 김선아표 도시재생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 그에 대한 질문을 포기하지 마라. 그 질문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의 낭만도 끝난다." 이 대사에 빗대어 본다면 "도시는 무엇으로 완성되는지 그에 대한 질문을 포기하지 마라."라는 메시지로 들려온다. 누구라도 한 명쯤 도시의 '낭만'을 건드려주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까? 계절의 시간이 바뀔 때마다 함께 살아 움직이며 제 모습을 변모시키는 생명력 있는 도시를 위해서 말이다. 물론 이는 의지와 실천의 문제이자 연대의 문제다.
"도시재생에서 중요한 것은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보다 지속가능성입니다. 시행착오와 크고 작은 실패 속에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고, 분노할 때도 있었어요. 여전히 도시재생이라는 거대 담론의 끝을 확신하기 어렵지만, 쉽게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함께 공감하며 서로를 돕는 '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뚜벅뚜벅, 하나씩 해나가는 거예요. 포기든 분노든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에너지로 전환해 쓰려고 합니다. 앞으로 열 하나 동네에 더 많은 일이 생기면 좋겠습니다."
그의 말대로 올해는 국내 어느 동네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일이 진행될 예정이다. 바로 <마을사전>을 만드는 일이다. 그동안 잡지에서 인터뷰한 사람들을 비롯해 업종별 정리, 동네 이름 유래와 길 설명까지 창덕궁 앞 동네를 총망라한 책이 만들어진다니 어찌 기대를 안 할 수 있겠나. 김선아 대표에게 '열 하나 동네 낭만꾼'이란 애칭을 붙여줘야 할 것 같다. 오는 가을에 열릴 축제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11동네'라는 주제로 특정 시대로의 여행을 준비한다고 하니, 벌써 창덕궁 앞 열 하나 동네의 가을이 기다려진다.
INTERVIEWEE |
창덕궁 앞 열하나 동네 | http://www.11dongne.com/
기획 | 이상미 편집 | 슬로우모어 사진 | 김태화, 창덕궁 앞 열 하나 동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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